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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그 도구를 가지고 하는 일) (2024. 1. 27 - 3.  1 / yeilgallery in Cheongju)

“찢겨지거나 말라서 해진 나뭇잎을 주워 모은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볕이 없는 그늘에 말린다. 찢겨진 나뭇잎의 사이, 그 사이를 조심스레 꿰맨다.

종이에 스웨터를 그린다. 자주색의 목이길고 올이 굵은 스웨터로 기억한다.

연필로 스웨터의 올을 그리는 일은 스웨터를 손수 짜는 뜨개질과 많이 닮았다.

그리다보면 어느새 정성이 실리며 서서히 형상이 드러나고 모양이 갖춰진다.”

 

모두 다 시간과 품을 필요로 한다.

성급하게 덤벼 억지로 닿을 수 있는 과정일 수 없고 거침없는 한 번의 스침으로 완결에 이를 수 있는 세계는 더욱이 아니다.

적당한 시간과 그만큼의 성의가 담겨야 하는 ‘짓’이자 ‘일’이다.

찢겨진 잎의 단면을 잇는 짓이나 종이 위에 펜을 굴리는 일 모두 오랫동안 지속해 온 나의 일부분이다.

 

바싹 마른 잎은 성급하게 다루면 쉽게 부서지거나 찢겨지기 쉽다. 알맞은 때를 찾아 조심스레 꿰매야 한다. 찢겨진 잎의 단면은 ‘상처’이며 ‘흠’이지만, 그 흠결 속에는 ‘아름다움의 흔적’과 ‘아픔의 흔적’이 보인다.

잎의 찢겨진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온전함에 대한 기억’을 쫓는 것이자,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은 생(生)의 흔적과 같은 식물의 ‘본래 모양’에 다가가는 것이다.

 

옷의 한 올에서 시작되어 올의 모양을 닮아가고 마침내 옷의 꼴이 갖춰지며 완성에 이른다.

한 올 한 올 얽어지는 올의 구성을 본보기로 뜨개질에 담긴 시간을 풀어헤쳐 옷의 밑그림을 채워나가는 과정 속에는 ‘몸의 기억’이 직조되고 환기된다고 생각한다.

마치 누군가의 ‘서사’가 시간을 타고 새겨지는 것이자 ‘몸의 흔적’을 쫓는 새김 같은 것이다.

 

시간의 곁에서 은밀하게 흐르며 가라앉은 ‘감각’을 떠올려본다.

뜨개질과 바느질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머물러 ‘행위’로 새겨지는 기억에 관한, 혹은 본래모양에 관한 흔적이 남아있다.

옷의 형상은 ‘몸의 흔적, 몸의 자취’를, 식물의 상처는 그 불완전함과 결핍으로 ‘온전한 모양’을 상상한다.

 

실과 바늘, 종이와 연필이 자아내는 특별할 것 없는 과정이 그런 흔하고 사소함으로 사물을 더욱 예민하게 반추한다고 생각된다.

실과 바늘이 일구는 의미를 매개로 오랜 시간동안 이어온 뜨개질과 바느질의 ‘오래된 이음’은 내게는 차마 버리지 못한 미련과도 같았다.

아직도 다 담지 못한 상념과 감각의 어디쯤에 남아서 몸과 마음을 재촉하고 마침내는 손끝에 머물러 잎사귀와 종이 위를 거닐게 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일컫던지 “뜨개 ‘질’”이나 “바느 ‘질’” 모두 나의 감각의 한 단면으로 남아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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